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시프 브로즈 티토 (문단 편집) == 사후의 평가 ==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 [[소련]]을 배신하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례로 코민포름 제명 이후 [[영국]] 정보국에 소련의 군사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등 뒤끝있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래도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부터 소련과의 사이는 우방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호전되어서 원만해지기는 했다. 티토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의 논지를 살펴보면 독자 노선을 택해 다른 공산주의 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제3세계를 주장하며 그 지도국격의 위치를 누린 점.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서방국가와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유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높았던 점을 든다. 아울러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 소련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배짱 있는 외교정책,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양하려고 노력한 경제정책, 복지정책 등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또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일어나 각 지역 내에서 학살과 인프라 파괴작전 등이 거리낌없이 펼쳐졌고, 그러한 전쟁의 결과물로 유고슬라비아가 7개의 소국으로 분리독립했으며, 새로 독립한 7개 국가들은 과거의 유고 연방 시기보다 훨씬 못한 경쟁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아예 동유럽 최빈국으로 전락한 나라도 있었다.] 이의 반작용으로 대대적인 티토 재평가가 일어났다. 특히 구 유고슬라비아 남부지역에 위치한 국가일수록, 티토 시절에 대한 향수도 강한 편이다. 이는 티토가 민족주의와 종교를 억압한 정책의 재평가가 되었는데 티토 사후 각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종교가 민족간의 갈등을 부추키는 불씨가 되어 참담한 전쟁으로 발전한 사실 때문이다. 각 민족주의자들과 종교인들은 타민족과 타종교에 맹목적 증오를 부추켜 유고슬라비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는 비교적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제3세계를 대표한 지도자라는 점이나 비교적 풍족하게 이루어졌던 사회복지 정책 때문에 티토 시절을 좋게 생각하거나 티토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크로아티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지에서는 티토에 대한 향수가 더욱 강해져서 이들 지역에서는 티토를 신급으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엔 꽤나 풍족하게 살았으나, 막상 독립한 이후에는 잔혹한 내전과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현재도 청년실업률이 높고, 상대적으로 1인당 GDP가 낮은 등 경제적으로 사정이 영 좋지 않다. 주요 기업들과 소규모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티토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해서 광고나 홍보를 하기도 하며, TV 프로그램에서도 티토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 구 유고권 국가들의 갈등이나 적대감이 조금씩 나아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그나마 덜해진 것도 티토 덕택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다만 반대로 티토와 유고 연방 시기를 그리워하는 구유고 각국의 구 유고슬라비아 노스텔지어를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대착오적이고 개인숭배적인 동시에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 등 구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동남부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분쟁과 갈등에는 이러한 민족/종교/지역 갈등을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하에 한 나라로 묶어서 억눌러 통치한 티토의 독재정치에 대한 반작용도 한몫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경기침체로 지역별 불균형 발전이 쟁점화되고, 그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등 민족주의 노선의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이들은 티토 격하 운동을 벌였다. 그 영향으로 구유고권 국가들 각국의 도심과 공원에 있던 티토의 동상이 속속 철거되고, 티토도 과거의 유물로서 한동안 잊혔다. 심지어 티토 시절의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매국노로 모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티토가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들 구 유고권 국가 출신 이민자들 사이에서 티토를 규탄하는 시위 데모가 일어났을 정도였다.] 세르비아 우파로부터는 과도정부 수상 당시 유고 내 대표적 우익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를 처형한 점이 비판받는다. '유고슬라비아의 독수리'라고 불렸던 이 장군은 [[체트니크]]라고 불리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레지스탕스 조직을 이끌고 반나치활동도 했으나, 20만명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슈냐크인도 학살했다. 전쟁 이후 그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신생 유고 연방]] 정부 측에 체포된 후 전쟁범죄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체트니크는 티토의 파르티잔과의 항쟁과정에서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함께 파르티잔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트니크를 지지하던 연합국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파르티잔을 지원했다.] 자신의 독재노선을 비판한 밀로반 질라스[* 티토와 같이 게릴라 운동을 같이 한 동지이자 초기 권력의 2인자였으나 티토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반체제 인사로 돌아선 사람이다. 심지어 질라스는 공산당 비판 작품들을 저술하여 투옥, 가택연금 상황 속에서도 정치 민주화를 주장하는 등 티토와 대립하였고 1980년 티토가 죽자 독재자가 죽었을 뿐이니 슬퍼할 필요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다 1995년 의문사했다. 정작 질라스 자신은 평생동안 국제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유지했다고.] 등에게 콩밥을 먹인 것 등으로 인해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이민자 사회로부터 욕을 많이 얻어먹기도 했다. 또한 어쨌거나 독재정치를 했다는 점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기도 한다. 또 유고 통합을 위해 민족 이주를 통제하거나 행정구역을 마음대로 편입시킨 것이 오늘날 유고 해체 이후에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항구도시 [[네움]]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영토로 확정지은 것이다. 이것 말고도 두샨 바타코비치의 《세르비아 역사》에서 언급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코소보나 마케도니아에서 살다가 전쟁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간 세르비아인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귀환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정말 계획대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통합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분할되어 버리자, 영토나 거주자를 재조직한 부분에서 분쟁이 발생한 것. 유고 연방이 붕괴하면서 내전 당시 인종청소가 빠르게 행해진 것도 이런 이유였다. 후술할 종교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종교에 회의적이었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는지라, 종교인들을 탄압한 행적들이 여럿 있다. 이런 [[국가무신론|종교탄압 행적]] 때문에 탈권위주의적이거나 개혁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자잘하게 비판받기도 한다. 1945년 티토하의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한 후, 곧 종교 박해 운동이 시작돼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투옥됐다. 개중에는 가톨릭의 [[https://en.wikipedia.org/wiki/Aloysius_Stepinac|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Alojzije Viktor Stepinac, 1898년 5월 8일 ~ 1960년 2월 10일) 대주교도 끼어있었다. 그는 1946년 9월 체포됐으며 반역죄로 판정받아 16년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그의 재판을 지켜봤던 몇몇 증인들은 그들이 고문을 당했으며 그들 가족들은 위협을 당했다고 말했다. 가톨릭 유아 세례를 받았던 티토는 1951년 12월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사형시키진 않았고, 조건부로 석방했으나 그 대신 그의 고향인 크라식에 억류(가택연금)시켰으며 대주교는 끝내 완전한 자유를 다시 얻지 못한 채 1960년 2월 10일에 [[혈전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스테피나츠가 우스타샤 협력자라며 맥락 자르고 단순화되는 경우가 있으나, 일단 협력자는 아니였으며 오히려 사적으로는 우스타샤를 비판했다. 다만 공적으로는 미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https://en.wikipedia.org/wiki/Jozo_Tomasevich|Jozo Tomasevich]]는 저서 [[https://books.google.co.kr/books?id=fqUSGevFe5MC&redir_esc=y|''War and Revolution in Yugoslavia, 19411945: Occupation and Collabo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1) 개인들과 집단들을 돕는 사적인 행위에서는 "그의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최고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다(deserves highest praise, although his actions were not always successful, 563쪽)" (2) 그러나 "세르비아 대상 제노사이드와 우스타샤 정권에 대한 스테피나츠의 언행에는 심각한 결핍이 있다.(there are serious shortcomings in Stepinacs statements and actions toward the Ustashe regime and its genocidal actions against the Serbs and the Serbian Orthodox Church, 564쪽)", "스테피나츠 대주교도 그 나라의 어떤 가톨릭 주교도 ... 공적 저항의 말을 하지 않았다.(neither Archbishop Stepinac, nor any other Catholic bishop in the state...uttered one word of public protest, 537쪽)"] 실제로 티토는 특히 가톨릭을 반동주의자들의 집합처로 간주하고 탄압했는데, 가톨릭은 유고슬라비아 22개교구 중 14개 교구가 교구장 주교를 잃었다. 약 350명의 신부들이 살해됐으며 다른 200명은 투옥됐다. 약 300개의 수도원 및 교회 기관들과 함께 18개의 신학교 중 3분의 2가 폐쇄됐다. 모든 교회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리고 전쟁구호기관(현 가톨릭구제회) 종사자들은 모두 추방됐다. 또한 유고슬라비아는 교황청이 내정을 간섭했다고 비난하면서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해 버렸다. 정교회 탄압도 심해서 전쟁으로 성당이 파괴된 자리에 [[파르티잔]]들을 기념하는 건물들을 세웠으며, 정교회가 소유한 토지와 건물 대부분을 압수했다. 정교회의 명망 있는 신부들은 수도원에 강제로 억류되거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 후인 1950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특히 반공주의자이며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코페]] 관구장주교 요시프 츠비요비치(Јосиф Цвијовић / Josif Cvijović)가 세르비아 총대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반국가행위 죄목으로 체포했다. 단, 이러한 종교 탄압은 종교 자체에 대한 탄압이라기보다는 종교의 (지역)민족주의 성향으로 인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지역마다 주요 종교가 달랐고[*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의 유고슬라비아인들은 혈통적으로는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발칸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한 [[슬라브인]](슬라브인중 가장 남쪽에 정착하였기에 남슬라브인이라 불리었으며, 이것이 남슬라브인의 땅(=유고슬라비아)의 어원이다.)의 후손들이고, 언어로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했다. 즉 민족을 '혈통과 언어로 구별되는 공동체'로 본다면 이들은 같은 민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별개의 민족으로 구별된 이유는 바로 종교적 차이였다. 남슬라브인의 주요 민족 구성 자체가 [[크로아티아인]]=[[가톨릭]], [[세르비아인]]=[[정교회]], [[보슈냐크인]]=[[이슬람]] 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통해 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래서 탄압이 정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보편적인 유고슬라비아인에 의한 민족국가를 지향했던 티토와 각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정면충돌의 발생은 불가피했던 것.], 이로 인해 일부 종교 지도자가 각 지역의 지역주의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티토 사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이 타 [[민족종교집단]]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것을 보면 티토 입장에서는 붕괴를 막기 위한 최선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21세기에 와서는 티토 1인의 억압적인 독재정치와 자신의 사망 이후의 대한 사후 대응 미비로 인해 유고슬라비아가 티토가 죽은지 약 11년도 안되어 종교, 민족 간 갈등과 분란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의 부재와 밀로셰비치나 카라지치, 이제트베고비치, 투지만 같은 각 연방내 국가들에 기반한 민족/지역주의 성향 정치인들의 득세로 국가가 해체, 붕괴되고 발칸반도가 혼란의 생지옥으로 변해버리는데에 직접적 원인으로 티토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부정적인 주장이 서방권 및 해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생기고 있다. 자신의 카리스마 못지 않은 능력 있는 후계 정치인을 키워서 사후에 정권을 넘겨주던지, 아니면 자신의 사후에 인구 구성비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의 권력 독점만이라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세르비아에서 분리시켜서 유고 연방 전체를 관장하는 연방 수도로 만들어놓거나[* 자국의 수도가 연방 수도 개념으로 별개 행정구로 나뉘어져 있는 미국의 [[워싱턴 D.C.]], 호주의 [[호주 수도 준주]], 인도의 [[델리 연방 수도구역]] 등이 대표적인 사례. 다만 전통적으로 무굴 제국때부터 영국의 식민지 시절까지 줄곧 인도의 경제, 정치적 중심지였던 델리나 행정구역들을 신설하는 과정에서 연방 전체를 관할하는 수도권 행정구를 새로 만든 호주의 사례와 달리 베오그라드는 유고 수립 이전부터 세르비아의 전통적 중심지였던데다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세르비아인들이 워낙 많았기에 티토가 인도나 호주의 사례가 같이 베오그라드를 연방 수도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거나 설령 했다 해도 티토 사후 연방의 붕괴를 막지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정 그것도 힘들다면 수도를 베오그라드가 아닌 다른 연방 공화국의 도시들로 이전하거나,[* 낙후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지역 경제 발전을 노리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로의 수도 이전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브라질]]의 [[브라질리아]]나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와 같이 계획도시의 형태로 절묘한 국토 중앙부 위치에 새 연방 수도를 만들어서 그곳으로 수도의 기능을 이전하던지 사후에도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보다 더 강한 중장기적인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티토는 기존의 판도를 전부 다 엎어버리는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 뿐더러, 기존 국가 시스템과 공산당 1당 체제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각 공화국의 대표들이 1년간 대통령직을 돌아가며 맞는 집단지도체제로 개헌하며 사망했다. 그리고 이는 유고슬라비아가 티토 사후에 개헌된 집단지도체제가 티토 생전 만큼이나 제대로 된 결속력을 내지 못하고 후일 참혹한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연방의 [[분열]]을 초래한 불씨가 되고 말았다. 특히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몰락이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제대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던 집단지도체제 형식의 공산당 1당 체제와 이를 노려 각 지역에 기반한 민족주의 정치인들의 득세로 연방이 붕괴된 걸 감안해볼떄 결과적으로 사후에도 유고 연방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대응 자체를 하지 않은 티토 본인에게도 책임이 없진 않다. 평가와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티토가 재평가되어도 유고 연방이 다시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구유고권 국가들에서 티토와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유고 연방 해체 이후에 갈라선 국가들이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할 만한 구심점이나 명분이 전혀 없다. 게다가 티토 사망 직후에 각국이 벌인 내전 와중에 종교, 민족, 상대국에 속해 있던 민간인들을 상호 학살, 추방하고 박해하던 각국 국민들의 악감정과 적개심 또한 만만치 않아 이 국가들이 다시 유고슬라비아 같이 통합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구유고 연방의 종주권을 쥐고 연방을 통제하려던 세르비아와 나머지 타 연방 소속국들이 갈등과 대립을 겪다가[* 티토 사후이던 1980년대에 각 연방내 국가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번갈아가며 통치하는 집단지도체제로 개헌되었으나, 밀로셰비치의 공작 아래 세르비아가 연방내 주도권을 독점하는 형국으로 변질되어 집단지도체제는 유명무실해졌다.] 연방에 속해 있던 나라들이 연방 해체와 분리독립을 놓고 참혹한 전쟁을 벌인 전적 때문인지 이 국가들에서도 티토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통일하자는 주장은 거의 없거나 미약하다. 또 하다못해 이민을 가거나 티토 사망 후 일어난 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전쟁 등을 피해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도피한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같은 구 유고권 국가 출신의 동부 유럽 이민자 후손들 사이에서도 전쟁으로 분열된 이 나라들을 유고슬라비아로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나오지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